밀성(밀양)박씨의 내력

 

 

              

          신라 왕자 밀성대군 박언침(新羅 王子 密城大君 朴彦 )

 

시조왕29세손이요 신라 54대왕인 경명왕(景明王)은 9명의 왕자를 두셨다. 이 9명의 왕자들로부터 계보가 다양하게 갈라져 나갔는데 그중 첫 왕자 휘(諱) 언침(彦 )을 밀성군(密城君)에 봉(封)하였음으로 그분을 밀성대군이라 부르며 그 후손을 밀성대군 언침파라고 칭한다. 그리고 9왕자들의 계보가 갈려나간 대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명왕  ˚˚˚˚˚˚

밀성대군(密城大君) :휘(諱)는  언침(彦 )

시조왕 30세손. 오늘의 밀양박씨(密陽朴氏)다.

 

 

밀성(密城 - 지금의 밀양) 성주(城主)로 봉작(封爵)되었기 때문에 그후 본관(본관)을 밀성(密城) 또는 밀양(密陽)으로 하였다.
밀양은 원래 삼한시대에 변한(弁韓)의 일부로 가락국에 속하였으며 신라 법흥왕(제23대왕 재위기간:514~540)때 신라에 병합되어 추화군이 되었다 가 757년(경덕왕16년) 밀성군(密城郡)으로 개칭되었다.
중조의 묘소는 실전되고, 전설로만 밀양읍 영남루 광장에 있었다고 전해 져 오다가 1921년 여름, 심한 폭우가 쏟아져 산사태를 이루면서 영남루 북쪽 광장에 드러난 커다란 구덩이가 전문가들의 조사에 의해 밀성대군의 묘소임이 확인되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제단을 설치 매년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향사 하고 있다.

 

고양대군(高陽大君):휘(諱)는 언성(彦成)

 

 

 

 

 

 

 

경명왕의 둘째아들로 고양대군(高陽大君)으로 봉작되어 본관을 고령(高靈)이라 하였다.
고양(高陽)은 본래 대가야국으로 562년(진흥왕23) 신라에 합병된 후 경덕왕 때 고양으로 개칭되었다가 그 후 다시 고령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본관을 고령으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조 이후 세계가 실전되어 계대가 불가능하므로 어사공파 파조 박섬(朴暹), 부창정공파 파조 박환(朴還), 주부공파 파조 박련(朴連) 등을 각각 起一世 (기1세)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속함대군(速咸大君):휘(諱)는 언신(彦信)

 

 

 

경명왕의 셋째아들로 速咸大君에 봉해 짐으로써 후손들이 그를 중시조로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조에 예부상서를 지낸 박선(朴善)을 1세조를 하고, 본관은 속함(速咸) 이 함양(咸陽)의 고호이므로 함양으로 하였다. 1세조의 묘소는 경남 함양군 함양읍 사금동에 있다.

 

 

(대군을 일함대군(逸咸大君)이라 칭하는 문중도 있다)

 

죽성대군(竹城大君):휘(諱)는 언립(彦立)

경명왕의 넷째아들로 고려초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태보 삼중대광

 

 

(太保 三重大匡)으로 계림군(鷄林君)에 봉(封)해 졌다가 그후 죽주백에 개봉(改封) 되고 죽주(竹州- 죽산의 옛이름)를 식읍(食邑)으로 ) 받았다.

그후 죽주가 죽산으로 개칭 되었기 때문에 본관을 죽산(竹山)으로 하게 되었다.

 

사벌대군(沙伐大君):휘(諱)는 언창(彦昌)

경명왕의 다섯째 아들로 상산(商山-지금의 尙州) 박씨의 중시조다.

 

 

사벌대군(沙伐大君)에 봉해지고 사벌방어장(沙伐防禦將)으로 외적을 막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신라는 고려와 후백제 의 침략을 받아 국토가 낙동강 동쪽으로 축소됨에 따라 사벌주(沙伐州)가 고립 되자 이를 지키기 위해 국민을 단합시켜 사벌국(沙伐國)이라 칭하고 왕으로 자립, 통치하다가 11년 만에 후백제에게 패해 망했다. 이 사실은 조선조 11대 중종中宗(서기1506~1544) 때의 학자 이언적 (李彦迪)이 사벌국사 를 저술, 비장했던 것을 후손 박세준(朴世俊)이 발췌, 유전함으로써 밝혀 졌다. 그러나 중조 이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때 덕천창 부사를 지낸 견(甄)을 1세조로하고 사벌국이 고려초에 상산국(商山國)으로 개칭(改稱)되었 으므로 본관을 상산(商山)으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완산대군(完山大君):휘(諱)는 언화(彦華)

경명왕의 여섯째 아들로 완산( 完山-지금의 전주)대군으로 봉해져

 

 

그 후손들이 본관을 전주(全州)로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중조 언화 의 아들 박웅(朴雄)이 고려 개국공신에 올랐고, 증손 박보진 (朴輔辰)은 완산군에 봉해졌으며, 7세손 박혁(朴奕)은 평장사를 지냈다.

 

강남대군(江南大君):휘(諱)는 언지(彦智)

경명왕의 일곱째 아들로 강남대군에 봉해졌다.

 

 

그 아들 영규(英規)를 중시조로 순천박씨를 형성하고 있다. 그는 후백제 견훤(甄萱)의 사위로 훤장군이 되었는데 935년 견훤이 왕위 승계 문제로 맏아들 신검(神劒)에 의해 금 산사에 유폐되었다가 탈출, 태조 왕건(王建)에게 투항하자 그도 이듬 해 태조에게 사람을 보내어 귀부(歸附)할 뜻을 비치고 태조가 신검을 칠 때 내응하여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그 공으로 좌승(左丞)에 임명 되고 승주군 에 봉해졌으며 전답과 말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 려 충혜왕 때 보문각 대제학, 관동존무사를 지낸 박숙정(朴淑貞)을 1세조 로 하였다.
중조와 1세조 사이에 고려조에서 평양부원군에 봉해지고 죽어서 순천 인제 산의 산신이 되었다는 박난봉 (朴蘭鳳)을 득관조로 하였는데, '여지승람 (輿地勝覽)'에는 '난봉이 영규의 증손이요, 숙정의 6대조다'하였으나 '순 천박씨세보(順天朴氏世譜)'에는 세계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본관은 중조 영규의 아버지인 언지가 봉군된 강남(江南)이 순천의 형승 (形勝)을 가리키는 것이고, 또 중조의 발상지인 순천이 신라 때 승평 (昇平), 고려조에 승주(昇州) 등 으로 불려지다가 충선왕 때 순천을 개칭 되었기 때문에 순천으로 하였다.

 

월성대군(月城大君):휘(諱)는 언의(彦義)

경명왕의 여덟째 아들로 월성대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월성으로 하였으며, 월성이 경주로 개칭된 연유로 경주박씨라고도 한다.
월성 박씨는 고려말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조선 초에 크게 성장하였다. 중조 언의의 13세손 박구(朴龜)는 고려말에 중군사정 부령 등을 지내 다가 고려가 망하자 인천의 장아산에 은거, 태종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산 위에 망경대를 세워 송경(松京)을 바라보며 통곡하다 죽었다.
그의 아들 박간은 태종 때 문과에 급제, 세종조에 청양현감, 단종조에 성균관 대사성 경주부윤, 성종조에 이조참판 판의금부사 등을 지냈다. 간의 아들 박휘지(朴徽之)는 장례원 판결사 대사헌을 지냈다. 그는 신겸(信謙) 호겸(好謙) 종겸(宗謙) 아들 3형제 를 두었는데, 둘째 호겸의 후손이 가장 번창했다

 

교 순(交舜):고려때국상공(國相公)

< 세보>에 이르기를 .... [麗太祖三徵不起 定宗三顧草廬 拜 國相公 誰不顯

 

 

擧章譜 有諱 故刊行] 로 기록했다. 즉, "공은 고려 태조가 3번 (벼 슬길에 나오라고)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고려 정종(定宗 949-975)이 삼고(三顧:3번 찾음)의 예로 국상공(國相公) 벼슬을 주었다. 공이 비록 (사적에) 현저하지 않으나 거장보(擧章譜)에 공 (公)의 휘(諱)가 있어 간행한다" 라고 했다. 국상(國相)은 고려시대 정2품 벼슬로 고위직이다. 울산(蔚山)등으로 관적(貫籍)됨.

국상공 교순을 경애왕의 왕자로 소개하는 문중도 있는데 경명왕의 아들들에 대하여 인터넷 자료마다 상이하다. 경명왕의 아들이 9분이라 하는 사이트가 있는가 하면 8분으로 게재하는 사이트가 있다. 즉 국상공 교순은 경명왕의 동생 경애왕의 첫째 왕자이며 경명왕은 8왕자와 1공주를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돈재공파 세보를 포함해서 여러 자료에  국상공 교순을 경명왕의 9번째 왕자로 기록하고 있다. 홈 운영자도 아직 입장을 정리하지 못했지만 실제 국상공의 후손이 있다고 하는바, 다른 문중의 기록을 여기에 게재하여 후일 고증하고자 한다. <이 홈페이지 "박씨의 유래"편에는 국상공을 다음과 같이 표기했음을 밝힌다. >

    * 경애왕 ---- 1왕자     금성대군 교순(金城大君 交舜)

                          2왕자    계림대군 입순(鷄林大君 立舜)

   

         밀성(밀양)박씨의 본관 사용유래

 

신라 35대 경덕왕(서기742-765) 16년(757년)에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군현(郡縣)의 명칭을 고칠때에 추화군을 밀성군(密城郡)이라 하고 밀주의 관내에 소속시키면서 5개의 속현을 두었다. 신라 54대 경명왕의 첫 왕자 박언침께서 밀성군에 봉해지셨음으로 우리의 본관조 밀성대군 후손은 지명을 따라 본을 밀성박씨로 정하였다. 그 후 밀성군의 명칭은 밀주군 - 밀성현 - 밀성군으로 변천했고 고려 마지막왕인 공양왕2년(1390) “밀양부”로 승격되었다. 그때부터 지명이 밀성에서 밀양으로 변경되었으므로 신지명인 밀양으로 쓰고 있는데 밀성박씨로 하든 또는 밀양박씨로 하든  다 같은 본관이다.

            *推火郡 - 현재 밀양시 내동 밀성재의 東齋가 추화재임

 

         밀성박씨 세계(密城朴氏 世系)

 

밀성대군께서 경명왕의 첫 왕자임에도 왕위를 숙부 위응(魏膺)이 이어 가도록 하고 밀성고을 하나를 받아 유유자적하였다.

밀성박씨 세계는 밀성대군으로부터 밀성대군 7세 언부(彦孚),언상(彦祥), 언인(彦仁)까지 계보며 고려시대다. 2세 욱(郁)은 삼한벽공도 대장군(三韓碧空都 大將軍)을 하셨으며 3세 난(瀾)은 요동독포사(遼東督捕使)이시다. 난(瀾)의 대에 이르러 밀성박씨계통이 많이 실전(失傳)되었다고 전한다. 4세는 영정(永禎), 영희(永禧), 영기(永基), 영구(永垢혹은永乭),영지(永址)등 5형제며 여기서 밀성박씨 후손이 급격히 분파 해 간다.

그중 영정(永禎)은 우리 돈재공파의 직계되는 분인데 한림학사(翰林學士), 참지정사(參知政事)를 하셨다. 5세 기세(基世)는 합문지후(閤門祗候)를 하셨으며 6세 시주(施做)는 보문각대제(普門閣大制), 이부시랑(吏部侍郞)을 하시고 7세 찬행(讚行)의 관위(官位)는 정당문학(政堂文學), 검교태전명하시중(檢校太傳明下侍中)이다.

찬행께서는 언부, 언상, 언인등 3형제를 두셨다. 밀성대군 8세손인데 이분들의 관위(官位)는 역사적인 문헌에 명쾌히 나온다.

밀성박씨 세계도  ☞  - 클릭

         밀성(밀양)박씨 12 중조(中祖)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구룡리에 원덕사가 있다. 밀성대군과 대군의 8세손 7명의 신위 및 그 후예 14명의 신위를 모셔 모두 22 중조를 모셨다.

당초 밀성대군외 19위를 모셨으나 2회에 걸쳐 2위를 추배 함으로서 22위가 되었는데 아래 도표의 <청색> 글씨가 밀양박씨 12중조 이시다.

☆ 제향일 - 음력 3월1일 제향

☆ 관리책임자 : 박 덕 보

☆ 원덕사 밀성박씨 종친회

☆ 고려조의 중시조(中始祖) 밀성대군을 주벽(主壁)으로 21위를 봉안(奉安)하 고 있음.  

 

언부(彦孚)

 

 

고려 문종조(1046년~1083년)에 최충과 더불어 태사 중서령, 도평의사 등을 역임하고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에 책봉(冊封)되었다. 종파인 은산부원군파, 행산부원군파의 중 시조 이시다.유지는 풍각화산 이라 하나 전하지 않고 있다.[태사공파조]

 

[元]

 

언부→의신(義臣)의 아들]: 사문진사를 역임하였다. [사문진사공파조]

부(父) 의신(義臣)은 당대의 문장가(文章家)로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지내셨다. 고려조 인종조에 사문진사를 지냈으며 또는 국자진사( 國子進士)라고도 한다. 유지는 밀양시 하남읍 귀명동이라 하나 전하지 아니한다.

 

[陟]

 

 

언부→의신→윤→창연→지형(之瑩)의 아들]: 고려 충선조 밀성군으로 분봉되었다.시호가 충헌공 이시다. [충헌공파조]

고려 26대 임금 忠宣王(서기1308~1313년)때 내부시승(內密部城侍君承)이며 (절충동찬화공신(絶忠同贊化功臣)으로 삼중대광 밀성군이며 시호를 충헌이라 증하고 증사패지(贈賜牌地)하야 공신자손으로 하여금 세수질록(世受秩祿)하였다.
밀양시 하남읍 귀명리 경모재에 단을 세우고 음10월 3일에 향사하다.

 

중미[中美]

 

 

 

 

 

언부→ 의신→윤→호연 5 대손] 고려 공민조 홍건적의 난을 평정하였으며 밀직부원 군으로 분봉되었다.

[밀직부원군파조]

고려 29대 임금 충목왕(忠穆王1344~1348년)때 문과에 급제하여 중서령(中書令)을 역임하였고 고려 31대 공민왕 恭愍王(1351년~1374년)때 이방실등과 함께 홍건적난(紅巾賊亂)을 평정 보리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輔理功臣 大匡輔國 崇祿大夫)를 추증받고 밀직부원군(密直府院君)에 봉해졌다. 태조가 등극하여 삼징(三徵)하였으나 나가지 아니하고 졸(卒)하니 왕이 예장(禮葬)하고 시호를 문숙(文肅)이라 했다. 증하다.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월봉리(옛이름-묘봉리) 묘소아래 묘봉재(妙峰齋)가 있어 음 10월 7일 향사하다.

 

[鉉]

 

 

 

언부→공필→윤공→광례 4대손]: 사헌부 규정이시며 규정공 파의 시조이시다.

[규정공파조]

고려조에 문과에 급재하여 벼슬이 사헌규정(司憲糾正-正三品)에 이르다. 노후에 향리에 돌아와 팔십칠세에 졸하다. 문장이 탁월하고 덕행이 높아 우리나라 유학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묘소는 알수없으나 장단군 장도면 사시리 박릉동 두매산 아래 자좌라 하였다.

언상[彦祥]

 

 

 

 

 

 

도평의사 밀직 부원군이시며 언부의 동생이시다.[도평의사공파조]

[출처 고려사] - 이 분은 우리 돈재공파의 직계선조 이시다. 신라 시조왕 37세 손이 며 밀성대군 8세손이요 도평의사공 1세이시다. 공의 뒤를 이어 2세 양신(良臣)→ 3세 직(直) →4세 인경(仁卿) → 5세 검(儉) → 6세 열 (說)→7세 창밀(昌密) →8세 거인(居人) →9세 승봉(承奉 : 여기까지 는 고려시대임)→ 10세 덕명 (조선 태종2년 무을과 합격)으로 세계 가 내려오고  있다. 원덕사에는 고려시대 공의 후예가 배향되어 있지 않으니 도평의사공파의 불찰이 아닌가 싶다.

태사공(太師公) 언부(彦孚)의 아우로 고려때 벼슬이 도평의사(都評議事)에 이르고 밀직군(密直君)에 봉하였다.

유지는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화산리라 하나 전하지 않고 있다.

언인[彦仁]

 

 

밀직군이시며 언부의 동생이시다. [복야공파조]

아우로 고려때 벼슬이 벽상삼중대광평장사(壁上三重大匡平章事와 상서좌복야(尙書 左僕射)를 역임하고 밀직군(密直君)에 봉해졌다.

 

☆시용

(時庸)

대제학(大提學 )

 

양언[良彦]

밀직부사공 이시다. [밀직부사공파조]

 

원광[元光]

 

 

 

 밀직부사(密直副使) 양언(彦良)의 6세손이다. 휘(謚)은 양혜공(襄惠公)이요 고려조에 벼슬이 영동정에 이르고 행재중서령(行 宰相中書令)을 지냈다. 공민왕조에 홍건적이 서경 함락시에 안유 이방실과 함께 격퇴하였으며 신축년에 박문거가 전몰한즉 홍언박과 함께 대가호종(大駕扈從)하여 평란에 공을 세워 보리공신보국숭록대부에 이르고 밀직부원군에 봉해졌다. 유지는 전하지 아니하다.

천익[天翊]

판도판각공 이시다. [판도판각공파조]

을재[乙材]

 

 

삼사좌윤공 이시다. [삼사좌윤공파조]

고려 명종조 정사(丁巳)에 문과 벼슬이 삼사좌윤 밀직부사(三司左尹 密直副使)에 이르다.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수덕제의 경현사에 봉안하며 음3월15일 음9월15일 향사하다.

 

☆인우

[麟祐]

전법판서공(典法判書 公) 을재의 7대손이시다

 

 

[?]

 

 

을재의 8대손]:정국군(靖國君)고려 말에 극성했던 왜구를 격퇴 한 무관으로 이성계(李 成桂)를 따라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 도순문사(都巡問使: 외관직으로 주. 부의 장관을 겸함)가 되어 쓰시마 를 공격해 전선 3백여 척을 불태웠으며 뒷날 이성계와 창왕(昌王)을 폐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추대하여 그 공으로 충의군(忠義君)에 봉해 지면서 충신이 되었다.

 

☆천[?]

을재 8 대손]: 구산군(龜山君)

 

 

☆령(齡]

을재→입기→정분]:昌原君(창원박씨)

 

☆원의

[元義]

을재→덕기→준]: 泰安府院君(태안박씨)

 

 

☆수[粹]

이조정낭(吏曹正郞)          

 

 

☆근[瑾]

수사(水使)

 

 

☆치온

[致溫]

군수(郡守)

 

 

 ☆태익[泰益]

부호군(副護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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